“천간(天干)에서 첫 번째를 이르는 말”로는 남북에서 모두 쓰인다. 천간은 전통적으로 연도, 날짜, 시간, 방위 등을 나타내는 데 두루 쓰였으며, 현대에도 순서나 등급을 매길 때 관용적으로 사용된다. 예를 들면 남에서는 국회의원 지역구 선거구를 구분할 때 ‘파주 갑(甲), 파주 을(乙)’과 같이 천간을 써서 표시한다. 불특정한 대상 중 하나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인다. “기술자인 나로서는 갑이 연구했건 을이 만들어냈건 상관이 없거던.”《로보트-승리호》와 같은 북의 예문이 이에 해당한다. ‘갑남을녀’, ‘갑론을박’등의 사자성어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한편 남에서는 계약서 등에서 계약을 주도하는 자를 ‘갑’, 그 상대를 ‘을’이라고 하는 관행이 있다. 상하나 우열 관계의 개념 없이 법률 용어로서 단순히 계약서상의 당사자 쌍방을 지칭하는 용어로 ‘갑’과 ‘을’이 쓰인다. 그런데 이러한 의미의 ‘갑’과 ‘을’에 점차 신분이나 권력의 상하나 우열 관계에 대한 인식이 반영되기 시작하여, 현재는 계약 관계를 벗어나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당사자 간 신분이나 권력의 차이가 있는 경우 ‘갑을 관계’에 있다고 한다. 또한 상대적으로 신분이나 권력의 우위에 있는 사람들이 지위를 악용하는 경우 ‘갑질’이나 ‘갑의 횡포’라고 이르는 등 새말이 생기었다.